주변을 보면 재테크의 시작으로 가장 먼저 은행 예적금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원금 손실이 없으니 가장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저 역시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통장에 찍히는 이자 몇만 원을 보며 뿌듯해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경제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제가 '원금 손실이 없다'고 믿었던 그 통장이 사실은 매년 조용히 손실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화폐 가치 하락'이라는 보이지 않는 도둑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내 통장에 있는 100만 원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왜 숫자의 보존이 가치의 보존을 의미하지 않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숫자는 그대로지만, 살 수 있는 양이 줄어든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돈의 가치가 일정하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100만 원을 현금으로 인출해 금고에 넣어두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5년 뒤, 10년 뒤에 금고를 열어도 세종대왕이 그려진 5만 원권 20장은 그대로 들어있을 것입니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트로 가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5년 전 100만 원으로 살 수 있었던 식재료와 생필품의 양을 100이라고 했을 때, 매년 물가가 평균 3%씩 올랐다면 5년 뒤 그 10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은 약 86% 수준으로 줄어듭니다. 즉, 내 금고 속 100만 원은 숫자로만 100만 원일 뿐, 실제 가치는 86만 원짜리 수표로 변해버린 것과 같습니다. 앉은자리에서 14만 원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2. 복리의 마법이 거꾸로 작용하는 '인플레이션의 역습'
재테크를 할 때 우리는 흔히 '복리의 마법'을 이야기합니다. 이자가 이자를 낳아 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현상이죠. 안타깝게도 인플레이션 역시 복리로 작용합니다.
물가 상승률이 매년 3%라고 할 때, 올해 100만 원이었던 물건은 내년에 103만 원이 됩니다. 그다음 해에는 103만 원의 3%가 더해진 106만 900원이 됩니다. 물가가 오르는 속도에 복리가 붙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가진 화폐의 구매력은 '역복리'로 떨어집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작년보다 연봉이 2~3% 올랐으니 다행이다"라고 안도하지만, 같은 기간 물가가 4% 올랐다면 실질 연봉은 오히려 삭감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의 화려함에 속아 실질적인 구매력이 낮아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바로 화폐 가치 하락의 무서운 비밀입니다.
3. 은행 예적금은 정말 내 돈을 지켜줄까?
그렇다면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를 받으면 안전할까요? 기준금리가 올라 은행 예금 금리가 연 4%라는 간판이 걸리면 많은 돈이 은행으로 몰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세금'과 '실질 금리'를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이자 소득에는 15.4%의 이자소득세가 부과됩니다. 게다가 당해 연도 물가 상승률이 3.5%였다면, 내가 손에 쥐는 진짜 수익률(실질 금리)은 0%대에 수렴하거나 심한 경우 마이너스가 되기도 합니다. 열심히 아끼고 모아서 은행에 저축했는데, 결과적으로 내 자산의 실질 가치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은행 예적금은 단기적인 자금 보관처나 비상금 용도로는 훌륭하지만, 장기적으로 자산을 증식하고 인플레이션을 방어하는 수단으로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4. 화폐 가치 하락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처음 이 사실을 직시했을 때 저는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습니다. "성실하게 저축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과거의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변동성이 큰 자산에 무작정 뛰어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자산의 포트폴리오(비율)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자산의 100%를 현금과 예적금으로만 쥐고 있는 것은, 인플레이션이라는 해커에게 내 지갑의 비밀번호를 열어준 것과 같습니다. 화폐 가치가 떨어질 때 반대로 가치가 오르거나 최소한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실물 기반의 자산, 혹은 경제성장률을 반영하는 생산성 있는 자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심 요약
인플레이션 환경에서 현금의 숫자는 유지되지만, 실제로 살 수 있는 '구매력'은 복리로 감소합니다.
물가 상승률이 연 3%일 경우, 현재의 100만 원은 5년 뒤 약 86만 원 수준의 가치로 떨어집니다.
은행 예적금 금리에서 세금과 물가 상승률을 빼고 나면, 실질 수익률은 마이너스가 될 수 있어 장기 자산 방어에는 취약합니다.
따라서 현금성 자산에만 올인하기보다, 물가 상승을 방어할 수 있는 다양한 자산으로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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